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홍준표의 인생 이야기

korea informations. 2021. 12. 19. 20:32

 

 

 

 

 

홍준표의 인생 이야기

  • 생애 
  • 학창 시절
  • 결혼 스토리
  • 검사생활

 

오늘은 정치인

홍준표, 홍카 콜라로도 유명하고, 검사로 재직할 당시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했던 홍준표의 인생 이야기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생애

출처나무위키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703/31/2017033103094_7.jpg

. 홍준표의 본명은 홍판표였는데 개명을 하게 되면서 홍준표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홍준표 페이스북에서 밝힌 바가 있는데

청주지검 초임검사 때 청주지법원장을 하던 윤영오 법원장이 밀양사람이고 홍준표의 고향이 밀양 옆 창녕이기에 말투도 비슷하고 해서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고 어느 날 둘이같이 저녁을 먹다가 윤영오 법원장이 판사도 아닌데 이름 중간에 판자로 되어있는 것은 안 맞지 않냐는 소리를 하고 개명을 권유하였고 개명을 하기로 하며 역술가 류화수 님으로부터 준 자로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홍준표의 아버지는 다른 집에 밭을 일궈주고 돈을 받는 소작농이었고 어머니는 문맹이었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고,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 군사정부가 고리채 정리 조치를 발표한 당시에 어머니가 법에 따라 고리채를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채꾼에게 머리채를 잡혀 보복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고 이런 모습을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족의 처지를 보며 나중에 검사가 된 것일까요? 고리채는 더욱 살기 어렵게 만들었고 가난은 지속되도록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출처 나무위키

초등학생시절 홍준표는 어릴 적부터 몸이 많이 약해서 7살까지 엄마젖을 먹고 자랐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졸업 당시의 키가 124cm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몸이 많이 왜소했으며, 집이 가난했다고 합니다. 학교와 집의 거리가 멀어 많은 거리를 걸어 다녔고, 초등학교 때는 의외로 친구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가난의 이유로 6번의 전학으로 인해 친구가 없었고, 이렇게 자연스레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공부는 항상 전교에서 1등을 기록했습니다. 

중학교 시절

 

중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홍준표는 배고프고, 가난이 이어졌으며, 너무너무 배고플 때에는 학교 운동장 식수대에 수돗물로 배를 채울 때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배고픈 시절에 공부에 더욱 힘을 쓰기 위해 누나들이 살고 있는 대구에 얹혀살 기로 하며 대구에 있는 학교를 다니기로 하며, 장맛비가 쏟아지던 그날 버스터미널과의 거리는 8km였지만 8km를 아버지와 걸어갔고 홍준표의 짐을 아버지의 지게로 들어줬는데 이때 홍준표의 부친 뒤에서 말합니다.

부모와 떨어져도 공부 열심히 할 것이며, 이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

말을 남기고 대구 대명동 누나 집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후 홍준표의 부모님도 홍준표 학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대구로 이사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대구에서 막노동을 하고, 어머니는 사과 행상을 하였고 이 셋을 단칸방에서 3명이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 단칸방이 비가 오는 날에는 비가 너무 들어오고, 바람이 불고 추운 날에는 바람이 많이 들어와 추운 방에 살면서 중학교 당시에도 하루에 잠을 5시간으로 줄여가며 공부를 놓지 않았고 전교 1등을 유지해나갑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홍준표는 1등으로 대구지역 고등학교 경북과 와 영남고중에 고르게 되는데 전액 장학금을 주는 영남고를 선택하게 됩니다. 

고등학생 시절

고등학교에서도 1등이었으며,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는데

원래 홍준표의 꿈은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였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생활비와 학비가 전혀들지않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것이 어떻겠냐 하여 육군사관학교에 합격을 하고, 다니려 하였으나, 하루는 대구에서 오래 살던 유지가 아니었던 아버지가 시장통에서 멱살 잡히며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말도 못 하고 반항도 못하는 아버지의 힘없는 모습을 보고 가슴을 울먹이며, 

 

육군사관학교 나와서 나라를 지키는 군인도 좋지만, 억울한 사람 도와주고 나쁜 사람 잡아넣을 수 있는 검사가 되겠다

하여 고려대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진학하였습니다. 

대학생 시절

학과 공부와 , 사법고시 준비, 그리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오던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시련이 찾아오게 되는데

이 당시아버지의는 경비원의 일을 했는데 일당 800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건물 안에서 경비를 하는 것이 아닌 건물 밖에서 바닷바람을 그대로 맞아가며 모닥불 하나 피워놓고 현대조선소에 담이 없고 철조망만 대충 쳐놔서 잔뜩 쌓인 철근과 자재를 노리는 도둑이 많아서 밤새 바다 칼바람이 부는 백사장에 앉아 10개월가량을 경비일을 했다고 합니다. 추운 날씨에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회사에서 소주라도 먹고 버티라고 막소주를 줬다고 하는데 고된 노동과 무리한 음주로 몸이 상하며, 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난이 연속되고 가난한 사람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고 어릴 적 배고픔에 운동장 수돗물을 먹고 집에 들어가 엄마 나는 배가 고프지 않으니 다른 가족들이랑 밥 나누어 먹으세요 할 정도로 가난도 싫었고

경상도 사투리로

 

세상이 확 뒤비짓으면

하는 생각으로 대학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결혼 스토리

사법고시공부를 번번히 떨어지며 끝까지 사법고시를 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고려대학교 앞 국민은행에서 일하던 여은행원 이순삼에게 첫눈에 반하고 발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홍준표는 숫기도 없고 돈 한 푼 없는 그였지만, 같이 은행 다니는 고려대학교 선배의 도움으로 데이트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이순삼에게 말을 건 냅니다. 

나는 아가씨 마음에 든다, 나와 앞으로 같은 집에서 살 생각 있으면 다음 주 수요일까지 고려대 도서관 4층으로 찾아와 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순삼은 도서관 4층에 찾아가게 되었고, 이렇게 찾아와 준 이순삼에게 홍준표는

프러포즈를 합니다. 형편 되는 데로 같이 살자

전혀 멋있지 않고 떨떠름하지만 순수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인어른될 분과, 정모님에게 인사를 하러 갔는데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공부만 하는 홍준표를 보고 저거 구름만 잡는 놈이다. 네가 어디 내 딸을 택도 없다, 저런 놈이 사법고시 붙으면 내손에 장을 지진다. 장모님은 이순삼에게 사람 착해 보이니 앞으로 잘해보아라 라고 했고

 

이후 홍준표는 사법고시에 당당하게 합격을 하며 잘살게 됩니다. 이후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기 전에 홍준표에게 손을 잡고 했던 말이 있죠, 

그때 내 미안했다. 내가 잘못했다.
홍준표는 웃으며, 특유의 입담으로 이제 아셨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며 사법고시가 길어지며 부인인 이순삼은 내조로 홍준표는 밥 3 끼 먹고 공부할 수 있었으며, 29세의 나이로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며 이제 검사생활이 시작되죠.

 

검사 시절

검사로 재직하면서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 유력인사들이 권력형 비리와 조직폭력배의 강력한 범죄를 온갖 외압에도 불구하고 성역 없이 수사하고, 이런 활약에 1995년 모래시계를 통해 알려지며 일명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세를 떨쳤습니다. 모래시계 드라마 아마 다 아실 겁니다. 배우 최민수, 고현정, 박상원, 이정재가 출연하였고, 박상원이 모래시계 검사였죠.

 

첫 번째

남부지청 특수부

검사로 발령됩니다.

발령되자마자 좌천이 됩니다. 시작부터 검사동일체 원칙을 어긴 홍준표는 통제할 수 없는 검사로 낙인찍힙니다. 

검사동일체 원칙이란

상명하복을 바탕으로 검사는 검찰사무에 관해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건을 적당히 덮고 다른 수사를 하라는 말을 듣지 않고 홍준표는 깊게 파고들다가 특수부에서 형사부로 좌천되며, 이후 광주지검으로 한 번 더 좌천되는데,

 

광주지청

좌천되는 것과는 관계없이 이 당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고, 이때 원래 홍준표 스타일대로, 광주의 조폭 수사에 착수합니다.  이후 조폭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거나 상경을 하는 효과가 나타났고 광주 쪽에는 조직폭력배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이렇게 정리되는 동안 홍준표는 많은 협박을 받습니다. 당신의 가족을 다 죽이겠다. 석궁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다 쏴 죽이겠다. 본인과 가족들의 신변에 위험도 많았지만 이런 협박 들을 다 이겨내며, 좋은 성과를 거두며 2년 만에 다시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 검사로 발령 납니다.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

이때는 일명 빠찡코라고 불리는 슬롯머신 수사를 담당하고 슬롯머신 사건은 당시 업계 매출 연 1조 2천 원 일정도로 1조 원의 수준의 호텔 카지노는 물론 경마까지 능가하는 규모였고 이 슬롯머신 업소 대부분은 정덕진 일파에 장악되며, 이들은 김태촌의 서방파와 손을 잡고 정관계 유력인사들마다 로비를 하는 거대한 사회악으로 성장해있었는데 이 사건을 해결하죠,

정덕진을 구속하게 되는데 김태촌에게 자금을 지원한 혐의로 체포합니다. 이후 정덕진의 어릴 적 배고픈 시절을 홍준표가 공감하고 유대를 쌓고, 홍준표에게 정덕진은 수사협조를 하며, 관련된 사람들을 구속하며

이렇게 큰 사건들을 해결해나갑니다.

 

홍준표의 정치인에 대해서는 많은 평과 아직까지 많은 논란이 있지만 검새 홍준표는 권력형 비리와 조폭들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정의와 법치를 지키려고 들었기에 후배 법조인에게 귀감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댓글